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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정혜진(09경영) 실리콘밸리 통신] 실리콘밸리뱅크(1983-2023)를 추모하며
등록일:2023-05-04
조회수:303

 

실리콘밸리뱅크(1983-2023)를 추모하며
정혜진[09경영, 서울경제신문 실리콘밸리 특파원]

 

“실리콘밸리뱅크(SVB)는 상인들이 그들의 고객의 이름을 아는 소중한 동네 시장 같았습니다.
공동체가 은행을 잃는다는 것은 가족의 상실과도 같습니다”
[마이클 모리츠, 세콰이어 캐피털 파트너]

 

 

실리콘밸리 생태계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던 실리콘밸리뱅크(이하 SVB)가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 SVB는 실리콘밸리 지역 내 기업과 개인 고객으로부터 예적금을 받아 스타트업에 대출해주는 구조를 갖춘 독특한 은행이었습니다. 기존의 은행이 정의하는 담보를 갖추지 않아도 성장성을 믿고 돈을 내어줘 기업들의 성장판을 키워준 곳입니다. 3만여 곳의 기업을 지원하며 40년 간 쌓아온 역사가 무너지는 데는 36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충격을 줬습니다.

 

3월 1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에 있는 SVB 본사 앞에서 파산 이후의 상황을 취재하고 있다.

 

SVB가 진출한 국가 중에 우리나라는 없습니다. 이 때문에 현지에 진출한 한국 스타트업 중에는 일부 투자자들이 유명한 은행이 아니라는 이유로 SVB를 선호하지 않아서 계좌를 열지 않았다는 곳도 있습니다. 하지만 SVB는 실리콘밸리 일대에서 예금 자산 규모를 기준으로 1위를 차지하는 은행입니다. 많은 벤처캐피털(VC)이 네트워킹을 위해서 펀드를 맡기고 투자한 스타트업에게 계좌 개설을 권유하는 은행이자 실리콘밸리 생태계에는 ‘믿을맨’으로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누적 투자 금액이 1억 달러 이상의 투자를 유치한 한국계 실리콘밸리 창업자는 “아무리 스타트업의 성장성이 커도 제가 지금 일반 시중은행에 가서 대출을 받으려면 어림도 없다”며 “담보 없이도 스타트업의 성장성을 믿고 대출해주는 시스템을 유일하게 갖춘 곳”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스타트업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대출 심사를 하는 시스템이 정교하게 설계돼 국내 금융기관과 부처에서도 매년 연구 과제로 꼽을 정도였습니다. 2000년대 초반 이후 대출 심사 인력들의 전문성을 높였고, 대출을 승인한 뒤에도 스타트업의 재정 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수수료 대신 워런트 명목으로 지분을 받는 등 스타트업 고객의 특성에 맞는 다양한 윈윈(Win-Win) 방법을 고려했습니다.

스타트업이 시드 투자를 받고 나면 이후 후속 투자나 대출을 받고 성장을 해서 기업공개(IPO)를 하거나 인수합병(M&A)을 진행하면 SVB나 SVB 증권에 관련 딜의 자문이나 중개를 맡겼습니다. 창업자가 이렇게 자금을 회수하고 나면, 또 늘어난 자산을 운영해 주는 프라이빗뱅킹 서비스도 운영하며 ‘동반 성장’하는 구조를 갖췄습니다.

 

  

3월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 핸오버 애비뉴(상), 샌드힐로드(하)에 있는 실리콘밸리뱅크(SVB) 지점에서 고객들이 예금인출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문제는 팬데믹 기간 과열된 성장에 대한 이상 징후를 감지하지 못한 점입니다. 팬데믹 기간 스타트업 생태계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예금 잔고가 빠르게 늘어났지만 위기 의식이 부족했습니다. 팬데믹 이후 VC로부터 흘러나오는 펀딩은 늘어나고 이같은 투자 유치금의 상당수는 SVB에 있는 예금 계좌에 고스란히 들어갔습니다. 예금 잔액은 2021년 말 기준 1,892억 달러(약 250조원)를 기록해 일 년 만에 86% 성장했습니다. 40년된 은행조차 하강기에 대한 경계심이 부족했습니다. 2001년 닷컴 버블이 꺼질 때 SVB는 자산 규모 42억 달러 수준의 작은 은행이었습니다.

포트폴리오의 리스크 관리도 부족했습니다. SVB가 지난해 말 기준으로 보유한 만기보유채권(HTM)의 평균 기한이 6.2년에 달할 정도로 장기인데 반해 고객들의 예금은 63%가 무이자 예금을 차지해 쉬운 출금이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경기 침체가 본격화되자 SVB의 예금 잔액은 지난해 3월만 해도 1,980억 달러(약 258조원)수준이었지만 지난해 말에는 1,730억 달러(약 225조원)로 줄었고 지난 달 1,650억 달러(약 215조원)까지 빠르게 빠져나갔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3분기 실적발표 때만 해도 SVB는 비교적 자신만만한 모습이었습니다. 대니얼 벡 SVB 최고 재무책임자(CFO)는
“좋은 소식이 있다면 채권 포트폴리오 비중이 줄고 있다”라며 “매분기 30억 달러 수준이 만기 상환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CFO가 한 가지 간과한 점은 예금 잔액이 더 빨리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지난 3월 9일 하루에만 420억 달러(약 54조원)에 달하는 출금 요청이 빗발치자 그렉 베커 SVB 최고경영자(CEO)는 주요 고객을 대상으로 “우리가 어려울 때 당신들을 기다려준 것처럼 조금만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달라”며 읍소했습니다. 하지만 정보 공유가 빠른 테크 업계의 특성상 공포심도 빠르게 옮았습니다. 일단 대부분 유동성이 부족한 상황이다 보니 은행이 요구하는 인내심을 발휘하기가 어렵기도 했습니다. 이를 두고 글로벌 컨설팅 업체 BCG는 ‘소셜미디어가 촉발한 최초의 대규모 은행 파산 사례’로 꼽기도 합니다.

SVB는 누구보다 고객의 특성을 잘 파악해 확실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었지만 동질성이 높은 고객군인 만큼 위기에 따라 취약한 부분도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미 재무부의 빠른 개입으로 예금주들은 모든 예금 자산을 지키게 됐지만 이제 실리콘밸리 생태계에 SVB는 없습니다.SVB 파산 이후 스타트업들에게는 더 높은 허들이 생긴 셈입니다. 애도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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